W .   닛   (  @  n   i   t  _  n  i  n  i  e  u  n  )




“내일 나랑 켄마는 연습 못 나오니까 부주장 말 잘 듣고. 부상 없게 조심하고.”



금요일 훈련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는 도중에 꺼낸 말이었다. “코치님이랑 감독님껜 말씀드렸어?” 옆에 있던 카이가 물어보자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침에 말씀드렸었어.” 그렇게 잡담하는데 아까 전 쿠로오의 말에 1학년들이 고개를 계속 갸웃거렸다. “혹시 두 분 무슨 일 있으신가요?” 시바야마의 말에 쿠로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결혼식 가야 해.”




그 말에 리에프가 이상한 소리를 했다. “엣, 그럼 두 분 결혼해요?” 무슨 헛소리야. 듣다못해 결국 야쿠가 정색하며 험하게 말을 꺼냈다. 그 말에도 켄마는 가만히 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촌 누나 결혼식이야.” 쿠로오가 목에 머플러를 감으면서 뚱하니 대답했다. “누구 사촌이에요?” 이누오카의 질문에 쿠로오가 답했다. “나.” 그러자 이번엔 이누오카가 갸웃거렸다.




“그럼 쿠로오 선배 사촌 누나 결혼식에 켄마 선배도 가는 거예요?”




그 질문을 할 때쯤 쿠로오는 로커를 닫고 있었다. 쿠로오는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켄마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흐흥, 알려줄까 말까 능글맞은 미소만 짓고 있었다. 켄마가 한숨을 쉬었다. “후유카, 집 가까워.” 아마도 후유카라는 사람이 쿠로오의 사촌 누나 이름인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집이 가까우니 친하다는 뜻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쿠로오도 ‘쿠로’라고 부르는 주제에 사촌 누나의 이름은 이름으로 부를 정도면 많이 가까운 사이인 것 같다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쿠로오는 그 와중에 혼자 켄마의 대답이 영 시원찮았는지 입이 조금 튀어나고 눈썹도 한쪽만 비쭉 올라갔다.


아, 질투하는 거구나.


야쿠와 카이는 아는 걸 둘은 몰랐다. 그게 참 웃겼다.




“그래서 둘이 같이 가? 켄마도 받은 거야, 청첩장?”
“응.”




귀찮게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의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방향 전환에 쿠로오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후유카가 켄마도 불러오라고 하며 줬지.” 그렇게 말하며 켄마의 어깨에 올린 팔을 굽혀 켄마를 제 쪽으로 끌어왔다. 켄마는 그런 쿠로오를 올려다보다가


한숨을 또 쉬었다.








“역시 불편해.”


켄마가 자꾸 제 셔츠 안쪽으로 손가락 하나를 집어넣고 당겼다. 학교 다닐 때도 복장 검사 때만 넥타이를 잠깐 하고 풀어버리는데 오늘은 셔츠 첫 번째 단추까지 잠가서 더 불편한 모양이었다. 제대로 정장을 입은 것도 아닌데도. 쿠로오는 자꾸 옆에서 투덜거리는 켄마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런다고 배탈 난 것처럼 그렇게 쓰다듬어서 갑자기 목이 꺼끌꺼끌한 게 낫는 것도 아닌데도 쿠로오는 뭐라고 잔소리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켄마를 쓰다듬어주었다.




“후유카도 결국 결혼하는구나.”




켄마가 바람에 흩어지는 먼지처럼 감정 없이 말했다. 그런데도 쿠로오는 그 말에 감정이 담긴 게 아닐까 싶어졌다. “…왜?” 왜 그렇게 말하냐는 뜻이었지만 켄마는 왜 그렇게 생각하냐는 뜻으로 생각한 모양이었다. “늘 결혼 같은 건 허례허식이라고 안 한다고 해놓고….” 그제야 쿠로오는 조금 웃었다. “뭐, 결혼식이 나쁜 것도 아니고 하면 좀 어때.” 그렇게 말하면서도 저도 좀 사람이 몰리기 시작하자 슬쩍 뒤로 물러나 켄마를 데리고 자판기 옆 구석으로 이동했다. 켄마의 고개가 좀 더 앞으로 숙어졌다. 쿠로오는 슬쩍 켄마의 정수리를 바라보았다.




“후유카, 행복할까?”




쿠로오는 알고 있다. 이 말은 전혀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았다는 걸. 담겨봐야 정말 말 그대로의 의문 혹은 호기심일 것이다. 그런데도 쿠로오는 이상하게 감정이 널뛰는 기분이었다. 결국, 시선을 제 옆 자판기를 바라보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보러 갈래?”
“…사람 없을 때 갈래.”




켄마는 정말 힘든지 식도 아직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벽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쪼그려 앉았다. 나는 절대로 결혼식 같은 거 안 해야지. 그 말에 쿠로오가 킬킬 웃었다. 그게 네 맘대로 돼? 상대가 너무 하고 싶어 하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 말을 하자마자 켄마가 한숨을 쉬었다.




“쿠로는 어떤데?”
“어?”
“쿠로는 어떠냐고.”




그렇게 말하면서 켄마가 쿠로오를 보기 위해 얼굴을 들었다. 조금 짜증이 나 있었지만 그건 쿠로오에게 짜증 나 있는 건 아니었다. 늘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짓는 흔한 표정이었다. “음….” 쿠로오는 그래도 고민했다. 답지 않게 어물어물 대답했다. “나도 뭐, 상대방이….” 그 말에 켄마가 살풋 눈썹을 세웠다가 곧 “흐응.”이라고 대답하며 다시 표정을 풀었다. 그걸 쿠로오는 보지 못했다. 켄마는 곧 다시 폰 화면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지 없다고 진짜로 교복 바지나 입으려고 하고. 쿠로오는 켄마의 옷차림을 다시 훑었다. 아침에 교복에서 자켓과 조끼 니트만 안 입은 상태로 입고 있는 켄마를 보고 얼른 다시 켄마를 그대로 180도 되돌려서 다시 집에 밀어 넣었다. 절-대 안 돼. 나처럼 정장 입고 오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적어도 아래 위는 다시 바꿔 와! 물론 그래도 결국 신발은 학교 구두지만 그건 그래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아니라고 생각하면 그래도 그렇게 안 보이니까. 보이지만. 아니, 안 보인다고 하자.




“막상 옷은 잘 입으면서.”




쿠로오가 투덜거렸다. 그것만 듣고도 켄마는 쿠로오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챘다. “이게 뭘 잘 입은 거야. 셔츠에 바지, 재킷 하나 걸친 건데.” 그 말에 쿠로오가 고개를 저었다. “그걸 잘 조합하는 것도 힘들다고. 그리고 너는 몸이 얇아서 태가 살아.” 확실히 쿠로오는 배구 이외에는 장점보단 단점이 많은, 큰 키 때문에 맞는 옷 하나 사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물론 다들 들으면 화를 내고는 했지만 막상 맘에 들고 괜찮은데 입어보면 발목이 훅 드러나 보이는 긴바지를 보고 있을 때. 그럴 때 정말 짜증 나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좀 의욕만 더 있었으면 좋겠는데. 쿠로오의 작게 혀 차는 소리에 켄마는 아예 이젠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
“응?”
“후유카가 지금 사람 없다고 오래.”




그렇게 말하면서 켄마가 몸을 일으켰다. 쿠로오는 제 사촌 누나이면서도 켄마 옆에 서서 따라 걸었다. 그러면서도 길을 찾지 못하는 켄마에게 “저쪽.”이라고 뒤에서 손을 뻗어 알려줬다. 신부 대기실 앞에 여자들이 우르르 나와서 순간 켄마가 놀라고 얼른 쿠로오 뒤로 제 몸을 가리려 한 걸음 뒤로 발을 뻗었다. “쿠로.” 켄마가 쿠로오를 불렀다. 쿠로오는 기꺼이 앞장섰다.




“아, 테츠로-, 켄마! 오랜만이네.”
“켄마하고 언제부터 라인 하는 사이였어?”
“넌 그것부터 물어보냐?”




신부 대기실에서 도우미가 면사포와 드레스의 레이스를 정리해주는 걸 가만히 기다리던 한 여자가 방금 들어온 시꺼먼 남자와 뒤의 시꺼먼 속이 자라고 있는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쿠로오의 퉁명스러운 말에 연습했던, 은은하고 단아한 미소를 짓고 있던 여자가 푸하학 웃었다. 본인의 원래 성격을 드레스라는 마법이 감히 죽일 순 없었다.




“켄마가 바꾸자마자 자동으로 등록됐지. 이게 바로 신문물이라는 거란다, 고-교생.”
“도대체 이런 성격 나쁜 사람을 왜 좋아하는 거지?”
“어머, 내가 이렇게 말을 비꼬는 건 너한테만 그러는 거 알지?”
“아유, 그럼. 제가 누님께 많이 배워서 웬만한 애들은 제 마음에 상처 하나를 못 내더라고요.”
“그럼요, 제가 우리 테츠로님 크게 되라고 어렸을 때부터 잘 교육했죠.”
“저도 누님 인생을 구제하기 위해 저분께 그저 연민했을 뿐, 도망가란 말은 안 했잖아요.”




아주 둘이서 신이 나서 서로에게 목소리만 예쁘게 꾸며서 내고 있었다. 켄마는 그때까지도 폰을 내려놓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다가 “후유카.”라고 한 마디 꺼냈다. 그러나 그 한 마디에 둘 다 모두 조용해지고 가만히 켄마를 기다렸다.




“결혼 축하한다고 부모님이 대신 전해달래.”
“우흐흐, 켄마는?”
“…후유카가 행복해서 하는 거면 축하해.”




켄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금은 자신이 없었는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그 표정을 보고 신부는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쿠로오는 그 웃음에 어딘가 씁쓸한 느낌이 들어서 아까 그렇게 싱글벙글 서로 험담을 주고받더니만 이젠 조금 눈치를 살피며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역시 켄마야.”
“아니야?”
“아니, 행복해. 행복해서 하는 거니까 축하 감사히 받을게.”




그렇게 말하고도 후유카라고 불린 신부는 잠깐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아, 역시 첫사랑이랑 결혼하면 좋았을거얼-.”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걸 보고 쿠로오는 혼자만 고개를 돌렸다. 켄마는 인상을 쓴 신부의 이마를 톡톡 건드렸다. 정말 가볍게 툭툭 건드렸다.




“고마워, 켄마.”




신부는 다시 밝아졌다. 그러고는 켄마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그러자마자 켄마가 펄쩍 뛰며 얼른 멀어진다. 쿠로오 뒤로 다시 숨는 걸 보고 신부가 다시 웃었다. 쿠로오도 켄마의 엉덩이를 토닥이는 걸 보고 저도 놀라서 켄마가 제 뒤로 숨자 슬쩍 제 몸을 기울여 켄마를 숨겨주었다. “켄마-.” 신부가 켄마를 불렀다.




“테츠로랑 할 이야기 있으니까 먼저 나가서 자리에 앉아있어.”




그러나 그러기는 싫은지 켄마가 인상을 찌푸리며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그럼 아까 거기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갈게.” 그건 괜찮은지 켄마가 잠시 앞으로 고개를 숙였다가 알겠다는 듯 쿠로오를 다시 올려보고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켄마가 나가고 신부대기실 문이 다시 닫혔다. 쿠로오와 신부는 문이 닫히고도 혹시나 3초 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결혼 축하해.”
“너한테는 진-짜 듣고 싶지 않았는데.”
“거짓말.”




쿠로오의 웃음에 결국 저도 따라 웃었다. “맞아, 이건 거짓말.” 여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맨어깨가 다 드러나는 드레스는 그녀에게 아주 잘 어울렸다. “좋은 사람 같더라.” 아까까진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막상 둘만 남자 둘은 서로에게 말을 신중히 골라 꺼냈다. 여자도 아까 쾌활하게 웃던 미소를 조금 평평히 하고 은은하게 웃었다.




“정말 결혼식은 하기 싫었어.”
“그러게 좀 더 이야기해 보지 그랬어.”
“그러기엔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해서 어쩔 수 없었어.”
“결국, 자랑이네.”
“그래요, 자랑입니다.”




나이는 자그마치 열 살이나 더 많으면서도 이상하게 둘은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장단이 맞았다. 사실 쿠로오와 켄마는 알고 있었다. 그녀가 그 둘에게 맞춰준 거라는 걸. 그리고 그녀도 알고 있었다. 열 살이나 어린 그 둘은 생각보다 어렸을 때부터 어딘가 단단한 심지가 있었다는 걸. “배구 아직도 같이하고 있고?” 그 말에 “올해는 꼭 전국 갈 거야.”라고 대답했다.




“청춘이네-, 청춘이야.”
“그렇게 말하는 후유카도 청춘이잖아.”




심지어 그 청춘의 가장 절정이라는 신부. 가장 비싼 돈을 들인 만큼 가장 예쁘게 기억에 남는 청춘. 쿠로오는 늘 그렇게 읊던 후유카의 말이 떠올랐다. 허례허식이라고 그렇게 주장하고 자기는 자유를 찾겠다고 누누이 말하던 사람에게 두 번째 사랑은 꽤 다정한 사람이었다. 늘 나를 생각해주고 조용히 손을 잡아줄 줄 아는 사람이야. 그 사람은 결혼식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한다. 결혼식에 대해 늘 말하고 다닌 게 있었던지라 처음에는 싫다고 했었다며 이야기를 꺼내며 사과를 입에 문 그녀의 다음 말도 꽤 기억에 남았었다.


나는 우리가 이제 우리라는 걸 확실하게 기념하고 싶어.


예쁜 너를 보고 싶다거나 결혼식을 통해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게 아니라서 순간 설레지 뭐야. 청첩장을 읽고 있던 켄마가 그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하지만 쿠로오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말이 담백하면서도 꽤 로맨틱하다는 것에 깊이 공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때의 후유카도, 지금의 후유카도 행복해 보였다.




“다행이다. 후유카도 행복한 사람 만나서.”
“뭐, 인마? 실연당하게 한 사람에게 그런 말 하지 말지?”
“고백도 안 했잖아.”
“그러니까 차이게 했다고는 말 안 했잖아.”




그런가? 쿠로오가 킬킬 웃었다. 후유카는 그 모습을 보고 또 인상을 찌푸렸다. 진짜, 내가 열 살만 더 어렸어도. 후유카의 말에 “그건 싫은데-.”라고 얼른 대꾸했다. “왜? 그럼 너한테는 승산 없을 거 같아?” 후유카의 도발에도 쿠로오는 그냥 웃었다.




“테츠로.”




그렇게 말하던 후유카는 곧 다정하게 웃으면서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쿠로오는 웃음을 지우고 조금 주눅 든 얼굴로 후유카를 바라보았다.




“결혼 선택 잘 해. 넌 첫 결혼 실패하면 계속 실패할 거니까.”




저주를 퍼붓네. 쿠로오는 쓴웃음을 지었다. 후유카는 이미 쿠로오가 누군가를 바라보고 있는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 말에는 꽤 많은 게 담겨있었다. 그리고 후유카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아도 쿠로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챌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꽤 이해도 잘하고 어른스러운 아이들이었으니까. “얼른 켄마에게 가봐.” 그 말을 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쿠로오가 고개를 끄덕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부 대기실을 나왔다.


결혼은 여자랑 남자끼리만 할 수 있어?


후유카는 정말 옛날에 들었던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신부 대기실 문이 닫히는 걸 보고 다시 제 손으로 면사포를 쓸어보며 그때를 떠올렸다. 그때의 쿠로오의 눈이 후유카에게는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럼 후유카는 켄마 좋아하니까 켄마랑 결혼할 거야?


아직 열 살도 안 된 아이가 후유카를 노려보며 뒤이어 말을 꺼냈다. 노려보는 그 눈동자엔 눈물도 그렁그렁 맺혀있었다. 후유카는 아이를 놀리고 싶었으나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럼 나는 켄마 좋아해도 켄마랑 결혼 못 해? 남자니까? 후유카만 되는 거야?




“다녀왔어.”
“응.”




켄마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대신 몸을 일으켰다. 화면은 계속 폰에 두고 있었지만 쿠로오가 걸으니 따라 걸었다. 곧 식이 시작될 거였다. 시작되기 전에 지정된 장소로 가서 앉아 있고 싶었다. 켄마를 위해서 좀 구석진 데에 지정할 건데 서운해하진 않을 거지? 청첩장을 가져다준 날, 후유카의 말에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유카가, 조금 구석진 데에 우리 자리 마련했대.” 들었던 말을 그대로 전달하자 켄마가 “응.”이라고 대답했다.




“결혼식이 조금 안 보일 수는 있다는데 서운해하진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켄마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아, 저기.” 쿠로오가 먼저 발견하고 켄마와 움직였다. “우리 둘뿐이네.” 테이블 의자 쪽에 쿠로오 테츠로 님, 코즈메 켄마 님이라고 적힌 종이가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4인 테이블에 둘만 마주 보고 앉아 있으니 꼭 여기가 결혼식이 아니라 데이트를 하러 온 것 같아서 괜히 쿠로오는 볼이 붉어졌다. 주인공이 우리가 아닌데도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에 고개를 작게 흔들었더니 켄마가 잠시 고갤 기울이다가 다시 화면에 집중했다. 잠시 후 결혼식이 시작될 예정입니다. 안내와 함께 떠들썩하던 분위기가 점차 식어가고 있었다. “다른 애들은 연습하고 있을까?” 그 질문에 켄마가 알 게 뭐야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켄마는 다른 게 궁금한 모양이었다.




“후유카 신랑은 봤어?”
“청첩장 주러 왔을 때 같이 인사 왔었어.”
“어떻게 생겼어?”
“음…. 곰 같이 생겼지.”
“뭐야, 그게.”




그렇게 말하며 켄마가 웃었다. 쿠로오는 켄마가 웃는 게 좋았다. 가만히 켄마가 웃는 걸 보고 있으니 켄마가 웃다 말고 조금 부끄러운 듯이 “…왜?”라고 말을 걸었다.




“후유카 첫사랑이 누군지 알아?”
“몰라.”




그러면서 쿠로오는 알고 있냐고 눈으로 물었다. 쿠로오는 이제 켄마의 눈만으로도 켄마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사실 그냥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래 알고 지내서 그런 거 아니냐는 야쿠의 말에도 쿠로오는 고개를 저을 수 있었다. 그렇게 따지면 엄마 아빠가 가장 먼저지. 하지만 쿠로오는 단언컨대 부모님보다도 켄마의 생각을 더 잘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쿠로는 알고 있어?” 쿠로오의 대답이 바로 이어지지 않자 켄마가 이번엔 말로 물었다. 쿠로오는 입을 열었다가 도로 다물었다. “켄마, 뒤에 봐.” 대신 그렇게 말했다.




“진짜 곰 같지.”
“…응.”




떨떠름하게 동의하는 켄마의 목소리가 재밌어서 쿠로오는 낄낄 웃었다. 테이블엔 가벼운 물과 애피타이저로 보이는 카나페가 몇 개 있었다. 쿠로오는 하나씩 손으로 집어 제 입에 넣었다. 긴장한 남성 다음으로 신부가 들어왔다. 하얀 웨딩드레스는 아까도 봤었는데 식장 안에서 보니 조명이나 분위기 때문인지 몰라도 훨씬 더 하얗고 단아했다. 왈가닥 같던 사람이 저렇게 달라지는구나. 조금은 긴장했는지 아랫입술이 삐죽 나와 있다가도 미리 와서 기다리던 남자가 저를 보면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계속 긴장된 모습을 보이니까 거기서 결국 신부가 웃었다.
신부가 웃자 환해졌다. 켄마와 쿠로오는 그걸 가만히 눈에 담았다.




“왜 여자들이 웨딩드레스 입고 싶어 하는지 알 거 같아.”




쿠로오의 말에 켄마는 저도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주례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쿠로오를 따라 켄마도 카나페를 하나 집어 제 입에 넣었다. 입맛에 맞는지 눈이 조금 커지고 반짝였다. 쿠로오는 그게 재밌고 귀여웠다. 더 먹어. 그렇게 속삭이며 쿠로오는 켄마에게 그릇을 밀어주었다. 켄마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 이따가 먹을래. 그 말에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첩장에 적힌 글귀 있잖아.”
“응.”




뜬금없는 쿠로오의 말에도 켄마는 잠시 떠올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그 글귀가 떠오르는 건 아니었지만 대충 보물보다 사랑이 더 귀하고 뭐, 그런 내용이었다. “제목이 결혼이었지?”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사실 극에서 나오는 거야.”
“그래?”




그렇게 흥미가 끌리는 내용은 아니지만 그건 몰랐다는 걸 의미하는 말투로 켄마는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또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바로 게임을 할 줄 알았던 켄마는 의외로 가만히 있었다. 대신 테이블을 조금 두드리기도 했지만 적어도 이 결혼식이 진행되는 동안은 다른 짓은 하지 않겠다는 것 같아 보였다. 쿠로오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일단 물로 목을 축였다.




“결혼하면 진짜로 행복할까?”




결혼은 얼마나 달콤한 숨결을 내뿜는지, 제비꽃 화단도 이보다 향기롭지는 못하리.


쿠로오는 그 문장에서만 계속 숨을 내쉬고 마시며 손으로 인쇄된 활자를 쓸었다. 이상
한 느낌이었다. 내 결혼식도 아닌데 쿠로오는 꼭 이 결혼식이 자신의 인생에 큰 획을 그을 것만 같았다. 쿠로오의 질문에 켄마는 참 오늘따라 쿠로오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쿠로.”
그래서 켄마는 쿠로오를 불렀다.
“결혼하고 싶어?”




그 말에 쿠로오가 울컥하고 누가 그런 거 때문에 그러냐고 말하려다가도 다시 입을 다물었다.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이상했다.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던 것 같은 신부가 웃었다. 신랑의 손을 잡고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쿠로오는 그 행복한 사람들을 보면서 이상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모르겠어.” 결국 쿠로오는 그렇게 부정적인 답을 내놓았다. 모르겠어.




“하지만 결혼식은 못 할 거 같아.”




그 말에 켄마가 “그래?”라고 대답하고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응, 결혼식은 못할 거 같아. 쿠로오는 다시 중얼거리더니 툭, 손등에 물을 흘렸다.




…쿠로?


켄마가 작게 쿠로오를 불렀다. 쿠로오는 고개를 숙인 채 들지 않았다. 훌쩍거리는 소리를 듣고 켄마는 손을 어색하게 뻗어 쿠로오의 손등을 쓸었다. 그 서툰 위로에 쿠로오는 고개를 또 털어내고 다시 똑바로 앉아 손가락으로만 툭툭 눈가를 찍었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웃었다.




“아까는 왜 울었어?”




결혼식이 끝나고 밖에 나온 후에야 켄마는 쿠로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결혼식 근처는 공원이었다. 공원 산책로를 따라 걸어 반대편 쪽으로 나가면 지하철역이었다. 날은 좋고 공언 안은 한적했다. “음….” 쿠로오가 부끄러운지 볼을 긁적였다.




“나도 모르겠어.”
“결혼식을 못 하면 쿠로는 슬퍼?”
“…그-런 거 아니거든?”




그러나 이미 켄마는 그렇게 결론을 내린 모양인지 흐응, 하는 소리를 내며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부정하는 것도 의미가 없었다. 쿠로오는 볼이 조금 상기되어선 “그냥, 후유카가 저주를 내려서 그래.”라고 어물어물 둘러댔다. “저주?” 켄마가 고개를 기울이자 쿠로오는 다시 뚱한 얼굴이 되었다.




“이상하게 쿠로는 후유카 이야기만 나오면 뚱해져.”




막상 친하면서. 켄마의 말에 쿠로오는 저도 모르게 그거야 연적이었으니까 그렇지! 라고 말하려다가 꾹 참았다. 어차피 후유카는 오늘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저는 …아직 용기가 없어 고백도 못 한 상태였다. 그리고 그 대상이…. 아니, 이야기하지 말아야지.




“쿠로는.”




켄마는 그렇게 쿠로오를 부르며 다시 질문했다.




“결혼식 하고 싶어?”




그 말에 쿠로오는 아까와 같은 대답이 나올 거라고 하려다가도 입을 다시 다물었다. 대신 다른 식으로 대답했다. “결혼식보다는 행복해질 수 있는 결혼을 하고 싶어.” 쿠로오는 진심이었다. 켄마와는 결혼식을 할 수 없다. 다른 사람과 결혼식을 한다면, 아마 그게 첫 결혼식이 되면 결국 그 사람과 오래 살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쿠로오는 켄마를 좋아했다. 켄마를 좋아하고 귀여워하는 후유카에게 울면서 짜증을 부렸던 것도 다 그런 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후유카는 결국 다른 사람과 결혼했고 행복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켄마와는? 쿠로오는 켄마를 좋아해도 그 후유카밖에 말하지 못했었던 걸 떠올렸다. 심지어 어느 정도 크고 난 후에는 후유카에게마저도 제 사랑을 언급하길 꺼렸다. 애초에 고백한 적도 없었다. 좋아하긴 하지만 고백을 해서 굳이 이 사이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하기 싫다고 해서 그래?”
“…그런 것까지 따라 하고 그런 건 아니라고.”
“무슨 말이야?”
“뭐가?”




켄마가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결혼식 하기 싫어서 그런 거 아니야? 쿠로오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해서 아니, 나는 너 따라서 대답한 건 아니고…, 라고 생각하다가 다시 아까 일을 떠올렸다. 분명 쿠로오는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말했지, 하지 않겠다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네가 하기 싫다고 했지 나는…어? 어? 어어? 쿠로오가 팔을 버둥거렸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인데?”




오히려 켄마가 지금 이 상황을 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쿠로, 나랑 결혼하는 거 아냐?”




쿠로오의 얼굴이 빨갛게 익었다. 켄마의 얼굴은 얌전하기만 했다. 그래서 더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걸 보고 켄마는 조금 인상을 찌푸리다가 곧 웃었다. 오늘 켄마의 옷은 교복이 아니었고 후드 티도 아니었다. 결혼식에 어울리는 옷은 하얀 셔츠에 단정한 베이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목에 한 넥타이는 넥타이가 없다고 투덜대던 켄마를 위해 쿠로오가 빌려준 거였다. 옷만 좀 다른 건데도 쿠로오는 켄마가 생소하면서도 다른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결혼식 못해서 운 줄 알았어.”
“아냐, 아니, 그….”




어떻게 알았냐는 질문을 하기도 전에 켄마가 먼저 눈치를 챘다. 쿠로오가 켄마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만큼 켄마도 쿠로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켄마는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그건 켄마가 관찰력이 좋으니까. 하지만 관심이 없는 것엔 전혀 관심 하나도 주지 않는데. 쿠로오는 이제 붉게 달아오른 과열 상태라서 폭주한 제 생각을 자신의 힘으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런…게 아니라.” 쿠로오는 결국 얼굴을 숙이고 잠시 심호흡했다.




“좋아하는 거 알았어?”
“응.”




숨기려고 했던 거야? 켄마는 오히려 반문했다. 그 말을 듣고 쿠로오는 뭔가 점점 열이 오르니까 환청이 들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잠깐만, 결혼한다는 이야기는 쿠로오가 켄마를 좋아한다는 것도 있지만 그 반대의 이야기도 성립이 된다는 뜻일까? 쿠로오의 입가가 올라갔다.




“켄마도 나 좋아해?”




그 질문에는 켄마가 바로 대답하진 않았다. 부끄럽다는 게 아니라 그걸 정말 묻는 거냐는 느낌에 가까웠다. 쿠로오는 얼떨떨했다. 결혼식에 갔다 온 것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기념일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아까 이날이 뭔가… 중요한 날이 될 것 같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어….




“나 왜 후유카가 결혼식을 했는지 알 것 같아.”




그리고 첫 번째 결혼이 절대 실패하지 않아서 다른 결혼은 필요 없을 거 같아. 그 말은 하지 않고 꿀꺽 삼켰다. 켄마는 고개를 기울였다. 왜? 라고 묻는 것 같았다. 하지만 쿠로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켄마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꼭 후유카를 닮아서 켄마는 뭐라고 하려다가도 그냥 가만히 그렇게 웃는 쿠로오를 바라보았다. 행복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W .   닛   (  @  n   i   t  _  n  i  n  i  e  u  n  )

값비싼 보물보다도 근처의 사람에게서 얻을 수 있는 안식이 더 귀하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한동안 '결혼'이라는 주제로 곰곰이 생각했는데 갑자기 결혼식에 참가한 (예비의 예비) 부부를 떠올려봤습니다.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부담없이 주루룩 글을 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다른 분들의 작품도 얼른 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