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이렇게 한 줄 남겨
떨려오는 가슴을 누르고
서툰 설렘이 벅차는 날
비가 오듯 눈물이 흘러내려서•••
비가 내렸다. 켄마는 창문을 두드리는 빗방울들을 보고 들고 있던 기타를 내려놓았다. 소나기처럼 어느 순간부터 빈틈 없이 쏟아지기 시작한 비가 마음에 들었다. 켄마는 창문을 반쯤 열어놓고 빗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톡 토독 톡, 하며 창문에 부딪히기도, 창문을 넘어 방 안으로 들어오기도 하는 빗방울을 한 손을 쫙 펼쳐 잡았다. 작지만 예쁜 손가락 사이로 빗방울이 샜다. 비가 오면서 생긴 안개와, 또 그의 한기가 함께 방 한 면을 채우기 시작했다. 조금은 추운 기분이 들었지만, 그 기분이 좋아서 켄마는 거실 한 가운데에 누웠다.
쿠로는, 뭐 하고 있을까.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지금쯤 차 타고 숙소에 가고 있으려나. 쿠로오가 고등학교 때 부터 하던 배구를 졸업 후 대학교에서도 하다가 국가대표가 된지 얼마 안 되었다. 그 곳에서 익숙한 사람 - 보쿠토라던가, 카게야마라던가 - 을 만나게 되어 힘들지 않다고 간간히 전화해오면 안심이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싫었다. 너무 좋아서, 돌아오는 것도 잊을까봐. 제 곁을 계속 비울까봐 걱정이 되었던 켄마였다.
켄마로 말하자면, 배구를 계속 하기엔 흥미도, 실력도, 신체도 역부족인지라 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라고는 어느 소속사에 들어가 싱어송라이터로 데뷔 준비를 하고 있는 것. 쿠로오와 함께 다니던 대학은 혼자 다니게 되었고, 카게야마와 함께 다른 대학의 체육과에 들어갔지만 국가대표 선발진에는 뽑히지 못한 히나타를 간간히 만나는 것 밖에 할 일이 없었다. 나름 바쁜 삶을 살고 있었지만, 제 인생에 가장 중요하고, 또 존재감이 큰 사람이 사라져버렸으니 무척이나 외로웠던 것이었다.
창문 바로 앞 바닥이 모두 젖어버렸다. 켄마는 벌떡 일어나 화장실 앞에 놓여있던 발닦개 겸 걸레를 발가락으로 끌고 와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두었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쇼파에 앉았다. 이런 날에는 작곡이 잘 되었으니 연습은 뒷전으로 하고 펜과 오선지를 꺼내어 탁자 위에 두고 기타를 다시 들었다. 아무렇게나 치다 보면 멜로디가 만들어지겠지, 하며 혼자만의 생각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이렇게 혼자 말 해도 넌 모르겠지, 혹시나 알게 되더라도 서툰 마음에 무작정 튀어나온 일부의 고백일 뿐이겠지. 이렇게 비가 오는 날, 그런 마음이 더욱 벅차서 가끔은 숨도 쉬기 힘들도록 울고 싶은 날이 오는데, 네가 없으니 그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도 없구나.
켄마의 기분에 따라서 느린 선율이 만들어졌다. 방금 한 생각을 짧은 글귀 안에 정리했다.
"안녕, 이렇게, 한 줄 남겨, 떨려오는, 가슴을 누르고..."
입에서 튀어나온대로 음을 적어내려갔다. 그리고는 음을 잊을세라 기타를 잡고 멜로디를 이어나갔다.
"서툰, 설렘이, 벅차는 날, 비가, 오듯, 눈물이, 흘러내려서..."
괜찮은 것 같았다. 노래는 괜찮았는데 켄마는 괜찮지 않았다. 괜히 보고싶은 마음에 눈물이 흘렀다. 스무 살이 넘은 나이가 되어서도, 쿠로오 없이 혼자 있는 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켄마에게 쿠로오는 서른 밤만, 서른 밤만 자고 올게, 하며 유치하지만 약속을 했다. 그리고 오늘이 스물 아홉 밤 잔 날이었다.
이쯤 되면 올 때도 되었는데, 하고 생각해버렸다. 애타기 시작한 순간부터 켄마는 울었다. 저녁 늦게 들어와도 수고했어, 하고 반겨줄 사람도 없고, 가끔은 땀냄새로 가득한 포옹 한 번 쯤은 괜찮은데, 그것조차 받을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거라곤 서러운 마음을 이렇게 비 오는 날 표현 하는 것 뿐, 더 이상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전화벨이 갑자기 울렸다. 고요한 집안을 깨운 벨소리였다. 켄마는 깜짝 놀랐다가 휴대폰이 있는 침실로 갔다. 왠지 벨소리는 애탔지만 발걸음을 더 빠르게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발신인이 누군지 보지도 않고 전화를 받으며 침대에 털썩 누웠다.
"...여보세요?"
"으어아어 켄마아아아아"
켄마는 통화 화면을 확인했다. 쿠로구나,
"...응, 쿠로."
"켄마아아아 보고싶어어어어"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시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쿠로오의 말투와 주변 소리를 들어보니 분명 회식 때 술을 마신 것 같은데, 국대라는게 저래도 되는지 싶었던 켄마였다.
"회식이야?"
"아아니이, 보쿠터랑....카게야므아랑....몰래 나왔지이...."
"...언제 와?"
"그게에...내가 서른밤만 자면 된다 했는데에....
직감했다. 아, 쿠로는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는구나.
"....못 와?"
"오 주...오 주 더 연장됐어...."
어느새 켄마는 손에 핸드폰을 들 힘도 없어 스피커폰으로 해두고 누운채로 허공에다 대고 말하고 있었다.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오 주라는 시간을 더 있어야했다. 그 때 되어서는 아예 안 돌아온다고 할 지 누가 알까.
"어, 켄마? 그, 쿠로가 좀 많이 취해서, 조금 있다가 내가 다시 연락할게..!"
"...네"
보쿠토의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는 끊겼다. 한 달만에 한 쿠로오와의 통화는 4분 13초만에 끝나버렸다.
사실 둘은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친한, 그것도 무지 친한 친구였고, 거의 가족이라고 봐도 무방했지만, 연인 같은 건 아니었다. 그 누구도 고백한 적 없고, 썸을 탄 적은 당연하게도 없었다. 쿠로오가 자신에게 잘 해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가 오래된 친구라서인지 켄마는 아직도 헷갈려하고 있다. 확실한 건 켄마가 쿠로오를 너무 오랫동안 좋아했다는 것, 그래서, 이 시간이 무척이나 힘들다는 것 뿐이었다.
그 이후로 켄마의 휴대폰에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무료함을 견디지 못해 켄마는 히나타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세 번 쯤 가자, 히나타가 가쁜 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어 켄마, 오랜만이야! 뭐해? 하고 전화기가 터져나올 듯한 에너지를 내뿜는 히나타에게 켄마는 어...만날래? 하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히나타는 켄마의 기분을 단 번에 알아챘고 지금은 힘들지만 두 시간 뒤에 만나자고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켄마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스킨과 로션을 바르고 - 그래도 곧 데뷔할 텐데, 관리해야지 - 애매하게 길어버린 머리를 꽁지로 묶었다. 집 청소한 지가 너무 오래 되어서, 기다리는 두 시간 동안 집 정리도 좀 하고, 기타도 기타집 안에 넣었다. 데뷔 앨범에 들어갈 노래 가이드를 틀어놓고 흥얼거렸다. 어쩌다가 데뷔라는 길을 걷게 됐는지도 갑자기 궁금해진 순간이었다.
약속 시간 까지 30분 가량 남았을 때, 흰 후드티와 청자켓, 그리고 검은색 바지를 챙겨입고서 신발장에 꽂혀있는 우산을 꺼내고, 운동화 끈을 묶는데 한참을 보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걸 보고 다급히 나갔다.
*
쿠로오는 엄청 취해있었다. 옆에서 말리던 걸 결국 켄마에게 전화해버렸고, 보쿠토가 억지로 전화를 끊고 나서 쿠로오는 자리에서 그대로 뻗어버렸다. 보쿠토와 카게야마는 순간적으로 쿠로오를 버리고 갈까도 했지만 팀 주장을 함부로 버릴 수 없었는지라 양 팔에 한 명씩 끼고서 억지로 끌고 갔다. 쿠로오는 끌려가는 내내 켄마의 이름을 수도 없이 중얼거렸다.
"켄마...켄마...보고싶은데...켄마..."
쿠로오가 자꾸 중얼거리자 보쿠토와 카게야마 역시 두고 온 아카아시와 히나타가 생각났지만 이 정도로 민폐는 되지 말자고 다짐했다. 쿠로오가 켄마를 어릴적 부터 좋아한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배구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한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당사자 빼고는 모두가 느낄 수 있었다만, 쿠로오는 일편단심 켄마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다. 틈만 나면 켄마가 보고 싶다고, 켄마 사진을 습관처럼 들여다보던 쿠로오였다. 켄마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전화를 걸다가도 자신이 힘들어질까봐 함부로 하지도 못했다. 결국 술을 마신 오늘 쿠로오는 일을 저질러버린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얼마나 자책하려고, 보쿠토는 쿠로오를 데리고 가며 중얼거렸다. 카야마는 생각보다 많이 무거웠는지 낑낑 걸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직은 조금씩 내리는 비라 빨리 숙소로 돌아가면 많이 맞는 것 만큼은 피할 수 있었다. 내일 모레 연습 게임이 있어서 컨디션 조절을 잘 해야만 했다. 억지로 숙소에 도착해 쿠로오를 내팽겨친 보쿠토와 카게야마는 한 숨 돌리고 쿠로오 방의 불을 껐다. 그리고 보쿠토는 자신의 주머니에 있던 쿠로오의 휴대폰으로 켄마에게, 갑자기 히나타가 생각이 난 카게야마는 히나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그....어...일단 대신 사과할게, 켄마. 많이 놀랐지?"
"...아니에요"
"주변이 좀 시끄러운 것 같은데, 밖이야?"
"네, 히나타랑 같이 있어요."
"엇, 켄마, 누구야? 쿠로오씨?"
"아니, 보쿠토씨야."
"뭐라고요, 지금 켄마씨가 히나타랑 같이 있다고요?"
"엇, 카게야마 목소리 들린 것 같은데!"
"보게야, 전화 좀 받아!"
"아, 잠바 안에 있어서 몰랐어 기다려봐"
"...전화기 너머 대화는 끝났니?"
"아,네, 보쿠토씨, 아자스."
"후, 그래서 켄마, 너무 걱정하진 말고, 오 주가 짧은 시간은 아니지만..그래도 너도 곧 데뷔라며?"
"...네"
"쿠로 많이 보고싶어하는 마음 이해해...내가 아무것도 못 해줘서 미안하다...그나저나 앨범 이름 뭐야? 나 하나 살래!"
"비가 온다, 요,"
"그래 그래, 연락은 할 수 있는 거니까 이왕이면 자주 해. 또 보자."
"...네"
보쿠토는 전화를 끊었다. 아직까지 히나타와 열을 내며 통화하고 있는 카게야마를 보고 피식 웃었다. 아직도 저러네. 아카아시는 바빴으니, 그리고 애초에 잘 보지도 못하는데 목소리만 들으면 여기 남아있는 사람이 힘드니, 가끔씩 전화하세요, 하고 딱 그어버린 마음이 오늘은 이해될 것 같기도 했다. 켄마도 지금 우울의 극치를 달리는 것 같던데, 마음 같아서는 보러 오라고 하고 싶었지만 보통 먼 거리가 아니어서 그렇게 말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내일 모레의 시합 때문에 더욱 그랬다. 에라 모르겠다, 하며 보쿠토는 전화기를 쇼파에다가 던져두고 먼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나서 보쿠토의 핸드폰 화면이 잠시 환해졌다. 오늘이 무슨 날이었던가, 아카아시가 내일 모레 시합 잘 하세요, 하고 문자를 보내왔다.
*
보쿠토와의 통화가 끝난 후 켄마는 한층 더 울적해졌다. 술집 안은 조용했다. 맥주를 한 모금 짧게 들이키고는 아직까지 통화하고 있는 히나타를 바라봤다. 어찌 저렇게도 행복해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 비법을 전수받고라도 싶었다. 오징어 다리를 뜯는 둥 마는 둥 하는데 드디어 히나타의 통화가 끝났다. 정말, 지나 잘할 것이지 나한테 난리야, 이러면서도 올라가는 입꼬리를 어찌하지 못하는 히나타에게 켄마가 물었다.
"쇼요는, 카게야마랑 못 보는데도 통화 하면 안 힘들어?"
"음, 뭐 굳이? 왜, 켄마는 그래서 연락 안 하는거야?"
"...응"
"아카아시씨도 그러던데, 그래도 목소리라도 듣는게 좋잖아."
"뭐...틀린 말은 아니지만,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쿠로도 당황스러울거야."
더 당황한 건 히나타였다. 아니 이 사람들, 진짜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마 본인 말고 서로가 삽질 중 이라는 걸 다 알 거다. 고등학교 합숙 때도 켄마가 먼저 씻으러 가면 쿠로오는 체육관에서 연습하다 말고 켄마에 대해 얼마나 자랑을 해대던지. 또 켄마의 옆자리에 잠자리를 맡으면 모두가 잠든 밤에 불을 꺼놓은 채로 켄마가 얼마나 쿠로오에 대해 이야기하던지. 둘은 자신의 감정을 '소꿉친구' 라는 이름 뒤에 숨겨두고, 혹시나 자기 혼자만 그러고 있는 것일까봐 함부로 용기내지 않고 있었다. 그러고 있다는 사실 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지금 떨어져 있는 이 시간이 그 무엇보다 힘들었을거다.
술을 모두 다 마시고, 약간 알딸딸해진 기분에 켄마는 히나타와 노래방에 갔다. 이상하게도 히나타와 있으면 안하던 짓도 그냥 하게 되는지라, 별 반대 없이 순순히 히나타의 뒤를 따라갔다. 히나타는 아마 켄마의 기분을 어떻게든 좋게 해주려고 노래방을 가자고 한 거였을거다. 히나타는 켄마에게 연습하고 있는 곡 같은 거라도 들려달라고 했다. 확실히, 노래 가지고 무언가를 할 예정이었던 사람인지 꽤나 잘 불렀다. 다만 그 노래가 하나같이 슬퍼서 히나타가 선택을 잘못 했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감성에 무수히 젖은채 자리를 파했다. 집에 도착한 켄마를 반기는 것은 여전히 어두운, 조금 더 차가워진, 쿠로오 없는 방이었다. 신발을 벗어던지고 허물 벗듯 옷을 하나씩 벗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세게 누웠는지라 침대가 잠시 흔들렸다. 아직도 비가 우중충하게 내려 까맣기만 한 창밖을 빗방울이 꾸몄다. 비는 계속 왔다. 켄마는 적막한 집안을 자신의 목소리로 채우려고 노력했다. 외롭기도 하고, 혼자 있으니 갑자기 무섭다는 생각도 들어서.
"비가 오네. 많이 오네......"
켄마의 작은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혔다. 기분 탓인지 더 거세게 내리는 듯한 비를 보며 다시 말했다.
"이쯤에서, 너도 왔으면 좋겠다."
거실에 있는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침대 옆에 있는 전자 시계는 붉은 색의 딱딱한 숫자로 12시 36분을 가리켰다.
"...보고싶다"
또, 말해버렸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어차피 쿠로오가 자신의 진심을 아무리 크게 말해도 못 들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속마음을 생각없이 내뱉을 때가 많아졌다. 실수로 쿠로가 들을 때 말해서 쿠로가 알아채버렸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도 늘 들었다. 빗줄기가 창문을, 아파트 벽을, 베란다 창살을 치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차가운 침대를 데우지도 않고 얇은 이불 한 장을 덮은 채 잠들었다.
늦게 일어났다. 다행히도 그 날은 공강이어서 상관 없었다. 다만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아카아시의 문자가 오랜만에 와있었다.
'내일 국대들 연습 경기라는데, 알고 있었어?'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하며 졸린 눈을 비비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1분 동안 미동도 없다가 이불 안에서 간밤에 자신의 체온으로 데운 침대의 따뜻함을 느끼며 아카아시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차, 아카아시는 오늘 1교시만 수업이 있었던 걸 잊고 있었다. 회계 수업이었던지 교양 수업이었던지는 기억이 안 난다만 아직 수업이 끝나기까지 10분 남았으니 기다리자, 하고 빠르게 생각하고 전화를 끊은 순간 수업 중이니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하는 문자가 왔다. 켄마는 손에 휴대폰을 꼭 쥐고 다시 눈을 감았다.
휴대폰을 진동으로 해놓고 다시 자서 휴대폰을 손에 쥐고 있던 켄마는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아카아시에게 전화 온 걸 겨우 뜬 눈으로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바깥에는 바람이 세게 불었나보다. 바람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렸다.
"....어....아카아시...."
"공강이라고 늦잠이냐"
"어제 술 마셨어...."
"데뷔한다는 인간이 그래도 돼?"
"어제...노래 쓰는 날이었어...으...왜...."
"?너가 전화했잖아"
"....어? 아 맞다, 연습 경기...."
"곧 연습 경기라는데, 뭐라 연락 했냐구."
"....아니...."
"아이고, 답답아, 왜 또."
"어제도 술 먹고 먼저 전화와서 힘들었어...."
"대체 왜 좋아한다고 말을 안하는거니, 너는"
"몰라...넌 연락했어?"
"했지. 어떻게 알았냐며 감동이라고 난리더라."
"....후"
"아, 혹시나 3일 정도 시간 뺄 수 있으면 가자고 하려 했는데, 상태 보아하니 미뤄야겠다, 오 주 연장됐댔으니까 아직 시간은 많아."
"...나 데뷔가 다음 달이야."
"우리 연예인씨, 너무 침울한 거 아니야?"
"하하...됐다, 아무튼 고마워. 내일 학교에서 봐."
"어어, 푹 쉬어."
전화를 끊고 새삼 실감했다. 아, 나 진짜 데뷔하는구나, 하고. 이 이미지로 어떻게 연예인을 하냐고 쿠로가 놀렸지만 잘 어울린다고, 또 켄마는 목소리도 좋고 노래도 잘 부르니까 괜찮을거야, 했었다. 그 말에 혹해서, 또 진짜 그럴만한 실력이 되었기 때문에 켄마는 이걸 시작했던 것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쿠로 장본인이 없을 것 같다는게 켄마는 이해했지만 너무 서운하고, 또 억울했다.
그냥, 말이지, 내려놓기로 했다.
*
연습 경기날 아침, 쿠로오의 조용하던 휴대폰이 알림을 하나 품고 있었다. 흔치 않은 알림이었는데다가 켄마에게서 왔던 거라 화들짝 놀라며 메신저를 확인했다. 연습경기, 잘 해. 짧은 한 줄이었지만 쿠로오에게는 얼마나 큰 깜짝 선물이었는지 모르겠다. 휴대폰을 들고 아침부터 방방 뛰고 있는 쿠로오를 보고 보쿠토는 아, 켄마가 응원문자 보냈구나, 하고 단번에 알았고, 카게야마는 쿠로오씨가 아침부터 왜이렇게 시끄러운지 속으로만 불평했다. 켄마는 아카아시와 전날 통화 이후로 용기를 내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 용기가 길바닥에 나앉은 먼지보다 작을 수도 있지만, 없는 것 보단 낫겠지.
원래도 잘했던 - 그러니까 국대였겠지 - 쿠로오였지만 켄마의 응원에 엄청나게 힘을 입어 수상할 정도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너네 이게 본경기였으면 도핑 의심 받았을 수도 있겠다, 할 정도로 잘 했던 날이었다. 켄마도, 쿠로오의 답장을 받고 그날은 기쁜 마음으로 1,2교시 수업을 듣고 연습실로 향했다. 켄마도! 연습 열심히 하고! 곧 갈게!
곧 갈게, 이 말이 사실상 힘든 일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말 해주는게 얼마나 좋았던지. 켄마치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연습실에 도착해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기타를 꺼냈다. 켄마,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하는 트레이너의 말에도 네! 하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우리 노래는 슬픈거니까 감정이입 잘 해야해? 하며 농담하는 트레이너를 보고 켄마는 씨익 웃어보였다.
타이틀곡을 가뿐히 부르고 비가 오던 날, 그렇게도 울었지만 그 때의 감정을 녹아냈기 때문에 단번에 수록곡으로 통과받은 노래를 조심스레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 불러보았던 날과는 다르게 부드러워진 기타 소리에 맞추어 가사를 읊기 시작했다, 마치 시처럼. 이 노래를 부를 때면 당연하게도 쿠로오가 떠올랐다. 벅차면서도 슬픈 기분을 담담히 말했다. 넌 이걸 타이틀곡인 줄 알 정도로 잘 부른다? 하고 트레이너가 칭찬했다. 데뷔까지 한 달이다. 한 달은 분명 빨리 지나갈거다. 켄마는 제 앞에 놓인 일부터 신경쓰기로 했다.
*
1개월 후, 코즈메 켄마 쇼케이스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켄마는 거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고 있었고, 무대가 있는 큰 홀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신인이라 많은 사람을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켄마의 외모, 목소리, 뭐 등등으로 SNS에서 이미 유명해져있었고 연습생일 때 부터 켄마의 팬이었던 사람들도 있었기에 쇼케이스의 자리는 사람들로 빽빽하게 찼다. 아카아시와 히나타는 2층의 내빈석에 앉아있었다. 아카아시가 뭐가 문제였는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히나타가 궁금하다는 듯 쳐다보자 아카아시가 찾았다, 하며 손을 들어 흔들기 시작했다. 히나타가 돌아본 곳에는 쿠로오, 보쿠토, 그리고 카게야마 까지 모두 있었다. 히나타는 카게야마를 보자 얼굴에 화색이 돌아 복도를 따라 달려가 안겼고, 아카아시는 보쿠토가 재빠르게 걸어와 어깨동무를 하며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쿠로오는, 조용히 자리로 들어가 켄마가 나올 때 까지를 기다렸다.
불이 꺼지고, 무대에만 불이 들어왔다. 켄마가 무대 한가운데에 들어서고, 1층에 있는 사람들이 크게 환호성을 질렀다. 켄마는 그 사람들을 보며 인사했고, 웃었다. 쿠로오는 새삼 놀랐다. 켄마, 혼자서도 잘 지내고 있었네. 이렇게 멋있는걸, 하는 생각이 드니 괜히 왔나 싶기도 했다. 연장된 건 5주였지만 4주로 억지로 줄여 켄마의 쇼케이스날에 딱 맞춰서 귀국한 참이었다. 지금 이 국대 세명은 일본 땅을 밟은지 이제 50분쯤 된 참이었다.
제일 먼저 앨범의 타이틀곡을 부르기 시작했다. 켄마답지 않게 꽤나 밝은 노래였다. 어, 근데 앨범 이름은 좀 슬픈거던데, 하고 보쿠토가 말했다. 아무렴, 켄마의 목소리가 홀 안을, 그리고 쿠로오의 귀를, 또 마음을 울렸고, 켄마는 무대 위에서도 행복해 보였다. 이리저리 웃어보이며 인사도 하고, 자신을 찍는 카메라들을 향해 포즈도 취해보고, 제가 늘 보던 귀여운 켄마이면서도, 낯선 켄마였다.
첫 곡이 끝나고 잠시 관객석에 불이 옅게 들어왔다. 그리고는 다시 무대에만 불이 켜졌다. 무대에는 아까와 다르게 의자, 스탠딩 마이크, 그리고 통기타를 들고 멀뚱히 서있는 켄마가 있었다. 켄마는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첫 앨범 이름이 '비가 온다' 인데요, 이 노래 때문에 그렇게 정하게 되었어요. 제가 쓴 노래인데, 트레이너 쌤이 아무래도 타이틀곡보다 이걸 더 잘 부른다고..."
말끝을 흐리며 농담까지 했다. 사람들의 환호성을 다시 한 몸에 받으며 자리를 잡고 기타를 고쳐 맸다. 그리고는 노래를 시작했다. 조용한 홀 안을 기타 선율로 채웠다.
안녕, 이렇게 한 줄 남겨
떨려오는 가슴을 누르고
서툰 설렘이 벅차는 날
비가 오듯 눈물이 흘러내려서•••
켄마는 눈을 감고 노래의 첫 부분을 부르다가 히나타와 아카아시가 있을 2층을 쳐다봤다. 두 명이 있어야 할 곳에 다섯 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 분명 쿠로오가 있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눈이 커져버렸다. 놀람이 가득한 눈과 슬픈 노래를 최대한 슬프게 부르는 입이 따로 놀고 있었다. 쿠로를 생각하며 만든 노래였으니, 쿠로가 있을 때 잘 불러야 해, 하고 생각하며 켄마는 노래를 이어나갔다.
작은 빗줄기에 어깰 내어
흐르는 눈물을 가리고
네가 언제 돌아올까
몰라서 늘 창문을 열고만 있어
가끔 의지가 약해져서 너무 외로워져서
감기에 걸리듯 추워져서
비가 오는 걸 바라만 보다가
네가 지금 당장이라도 올 것만 같아
이렇게 편지만 남겨
서툰 고백을 담아
너에게 보내지는 못하지만
언젠가는 말할 날이 오겠지
하며 다시 눈물로 적셔
트레이너의 예상대로 타이틀곡도 좋았지만 이 곡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켄마는 뿌듯한 마음으로 다시 올려다보았다. 쿠로오는 없었고, 다만 네 사람의 환호성만 남아있었다.
쿠로오는 켄마의 두 번째 노래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왔다. 비밀번호를 치고 가쁜 숨을 내쉬며 문을 열었다. 쎄한 공기가 쿠로오를 덮쳐왔고, 쿠로오는 거실로 뛰어가 벽에 붙어있는 수많은 켄마와 자신의 사진을 발견했다. 훈련 때문에 떠나기 전에는 없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열려있는 창문을 발견했다. 노래의 의미를 깨달을 수 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켄마의 방문을 조심스레 열었더니 눈 앞에 펼쳐진 건 노래 작업물들 뿐, 자신이 없는 시간 동안 켄마가 여기서 생활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생활의 흔적은 자신의 방에 가득했다. 헝클어진 베개, 이불, 갖가지 화장품들, 헤드셋, 그리고 생각날 때 마다 기록하려고 둔 노트까지. 그리고 그 노트 한 장에 무수히 많은 보고싶다, 가 보였다. 그렇게 쿠로오는 가만히 앉아있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걸까, 아니면, 그저 자신은 이렇게까지 하지 못함에 대한 미안함일까.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켄마가 집에 돌아왔다. 쇼케이스가 끝나고 팬미팅을 잠시 하고서는 바로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아카아시, 보쿠토, 히나타, 카게야마는 다시 연락할테니 받으라고 한 뒤 어딘가로 사라졌다. 분명 쿠로오를 봤는데, 쿠로오만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신발을 벗어던지던 참에 낯익은 운동화가 보였다. 그리고 제가 그리던, 그렇게도 보고싶다고 울었던 사람이 눈 앞에 서있었다.
쿠로...! 하면서 켄마는 들고 있던 가방도 모두 신발장 앞에 던졌다. 그리고는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던 짓을 했다. 저를 멍하니 쳐다보는 쿠로 앞으로 달려가, 카게야마와 히나타라던가, 보쿠토와 아카아시가 그러듯, 뛰어가서 안겼다. 아끼던 인형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고서 너를 영원히 잃지 않을거야, 라고 하며 안듯이, 켄마가 꼭 그랬다. 쿠로오는 그런 켄마를 말 없이 꼭 안아주었다. 바깥에는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쿠로오가 닫다 만 창문 사이로 빗물이 샜고, 둘은 신경쓰지 않은 채 한참을 그러고, 소리 없는 눈물도 흘렸다. 아마 이제서야, 전하지 못한 진심을 흠뻑 젖은 편지를 통해 전한 것이겠지.
*
"켄마! 여기!"
"여어-"
"다들 왜이렇게 일찍 돌아오셨대요"
"아카아시는 나 안 보고싶었어ㅠㅠㅠ?"
"5주 연장 됐다면서 사람 갖고 노시냐구요."
"ㅠㅜㅠㅜㅠㅜㅠㅜㅜㅠ아카아시ㅠㅜㅠㅜㅠㅜㅜㅠ"
"야, 너 내가 몸 잘 챙기랬지? 이거 손등 뭔데."
"아, 아니..이거 그냥...넘어지면서 살짝 쓸린거야.."
"히나타 보게!!!!"
"ㅁ뭐! 카게야마도 파스나 덕지덕지 붙여오고!"
"시끄러..."
"켄마님이 시끄럽대잖아 조용히 해"
"와...."
"아 예, 분부대로 닥치겠습니다."
"켄마, 뭐야, 고백해버린거야?"
"...쇼요, 넌 그걸 대놓고 말하냐."
"빼박이네."
"응 노코멘트"
노래 가사는 이미 지어놨던 거였는데 마침 주제가 딱 맞더라구요 그래서 켄마한테 노래를 시키고 싶어서
국대 쿠로오랑 가수 켄마로 썼습니다 사실 저 노래 음도 있는데 제가 악보로 못 만들어서 그냥 묵히고 있었는데 헤헿 그러합니다 ((??))